시월항쟁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란 누구인가? 한국전쟁 당시 불법적으로 학살된 민간인은 1960년 장면정권때 피해유족들이 신고한 바에 의하면 100만명이 된다고 한다.

그 중 경북만 21만명(경남 22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민원은 그 당시 조사되지 못한 채, 박정희 군사쿠테타로 완전 좌절된다.
이 중에는 거창양민 학살처럼 민간부락을 보복 학살하거나 소위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인근  마을 주민을 학살하거나, 그 외 경주 내남면의 이협우씨 처럼 재산약탈을 목적으로 주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는 등 여러가지의 경우가 있다.
거기다가 노근리 처럼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한 경우도 있다.
전쟁기간 학살의 가장 범죄적이고 잔인한 학살은 민주주의운동, 민생운동, 민족운동 및 그러한 사건과 연관된 인사에 대한 정치학살이다.
이들은 전쟁기간 중 직접적 교전과 관계없이 국가권력이 기획하여 학살한 것이다.
정치학살도 다양한 경우가 있지만 대표적인것이 보도연맹 학살과 형무소 정치수감자 학살이다.
예를 들면 대구형무소의 경우 미국 자료에 의하면 대략 4천명이 대구형무소에서 가창골이나 경산코발트 등지에서 학살되었는데 형무소에수감되어 있던 정치수감자( 이중에는 제주 4.3관련자도 많이 있었슴)와 예비검속 된  보도연맹원들 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예비검속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2일 수용되어 있다가 모두 가창골로 실려 가신 것이다.
대전 이남의 전국 보도연맹원들은 예비 검속되어 형무소 외에도 경찰서, 조합 창고등에서 1-3일 검속되어 있다가 모두 인근의 산골에서 학살되었다.

 

보도연맹원이란 누구인가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내무부(경찰지휘부)의 주도 아래 결성된 사상전향단체이다.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거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세력의 구성원들을 자수나 사상전향하게 하여 경찰이 감독하던 조직이다. 그러니까 이 조직은 정부가 관리하던 조직이다. 물론 이 중에는 자의에 의한 가입자도 있겠고 타의에 의한 가입자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 조직이 탄압을 받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는 국가가 조직한 단체이다.
1950년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국민 보도연맹 소속원들은 인민군에 협력하여 치안을 담당하거나 군인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 중에는 뜻이 확고한 경우도 있겠지만 인민군 눈치보기 때문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이승만은 대전 이남의 형무소 수감자,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지시한다.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가 33만명이었으니 가입하지 않고 있다가 검거된 사람을 포함한다면 학살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문제는 조사나 재판없이 임의로 학살한 것이다. 어떤 범죄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예비한다는 가정하에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는 반드시 국가가 배상하고 명예를 회복하여야 한다.

 

 10월항쟁과의 관계는….
한국전쟁에서 학살된 보도연맹 가입자의 대부분 그리고 형무소 수감자의 대부분은 1946년 10월항쟁 참가자들이다.
때문에 10월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에를 회복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도한 10월항쟁 유족이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모든 사람이 참가할 수 있는 조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만 10월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지역적으로 10월항쟁은 남한 전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전국의 어느 지역 유족도 참가할 수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물론 항쟁의 정당성을 규명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10월민중항쟁은 복권되어야 한다 

1.머리말

한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우리 국민과 학계가 분노했다. 한 TV토론에서 학자들이 동북공정을 성토하고 고구려가 우리 역사임은 너무나 분명하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참석자 중 한사람이 특이한 주장을 했다.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도 아니다. 고구려는 고구려인의 역사다…” 다른 참석자들은 매우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얘기에 크게 공감했다.

우리가 배우고 느끼고 있는 역사란 현재 우리 집단의 일치성과 정당성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적 현재 우리의 위치와 입장에서 과거사를 바라본다. 보다 더 들여다보면, 현재 우리 집단 내에서 헤게모니를 쥔 집단의 입장에 맞도록 과거의 일들이 해석되고 꾸며지는 것이다. 더구나 그 헤게모니 집단이 매우 독점적이고 독선적일 경우, ‘과거의 일’이 제멋대로 해석되어 최소한의 객관성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전형적으로 안고 있다. 다만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면서 이 독선적 헤게모니를 해체하고 다양한 견해가 공존할 수 있는 민주적 성숙이 이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독선적 역사관은 도처에서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수구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가 정권교체 이후 수구세력에 의해 전면적 도전을 받았다. 하지만 아주 일부를 수정하는 정도에서 종료되었다. 결국 그 정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현대사를 현재의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편향으로 바라보지 말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로 바라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 시대를 살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오히려 객관적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필자는 그러한 시각을 어느 정도 가지면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2.편견 없애기

< 10월항쟁은 남로당 박헌영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
이 논리는, 박헌영이 9.28노동자총파업을 지시하였고, 이 때문에 대구폭동이 발생하여 전국으로 번져 갔다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항쟁에 참여한 전국의 민중들을 마치 박헌영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한편에서는 박헌영을 &lsquo;항쟁의 신&rsquo;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대구항쟁의 직접적 촉발계기는 &lsquo;파업하던 노동자의 죽음&rsquo;과 그 무엇보다도 &lsquo;식량부족&rsquo; 문제였다. 대구시민들이 노동자 파업의 내용에 주목하였다기 보다는 &lsquo;파업하던 노동자의 죽음&rsquo;에 분노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분노한 것이다. 대구에서 경북으로, 전국으로 번져간 항쟁의 동기는 역시 농촌지역에서의 식량강제수집에 대한 농민들의 자연발생적 저항이었다.

9.28총파업 이후 전개된 10월항쟁 과정에서 박헌영을 포함한 중앙정치지도자들은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만큼 10월항쟁은 자연발생성이 강하였으며, 그런만큼 거대한 항쟁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효과적 전술을 구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탄압에 앞장선 친일배들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 10월항쟁은 잔인한 폭동이다 >
결론부터 미리 언급한다면, 10월항쟁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한 민중항쟁이며 &lsquo;목표와 대안 없는 난동&rsquo;을 의미하는 &lsquo;폭동&rsquo;은 결코 아니다. &lsquo;잔인하다&rsquo;는 평가 역시 일방적이다. 대구 인근을 중심으로 일부 경찰과 관료에 대한 잔인한 살해가 있었지만, 그들이 일제시대부터 민중을 혹독하게 탄압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징용과 정신대 보내기에 앞장선 반민족, 반민중, 일상적 폭력세력임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8.15해방 즉시 보복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하지 않을까? 더구나 항쟁이 진행되면서 진압세력의 잔인함은 극치에 이르렀는데, 형평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부당한 평가가 아닐까?

 

사실 당시 민중들의 분노의 폭발은 친일관료, 경찰의 재등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8.15해방으로 두려움에 떨던 친일관료와 경찰은 근무지를 버리고 도망다니기에 급급하다가 맥아더의 포고령 1호 제2조 &ldquo;…정부 등 모든 공공 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는 명령에 의해 직장에 원상복귀하고 다시 일제 하 통치를 방불케하는 억압적 행위를 자행했다. 이들은 농촌에서의 식량수집과 도시에서 배급과정에 투입되어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국민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이때 대구에서 파업하던 노동자가 경찰에게 총격을 당하여 사망하자 대구시민들은 이를 반일주권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해방 이후로 이룩한 자주적 성과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항쟁인 것이다.
<이 무모한 항쟁으로 인해 미군정과 친일경찰과 관료와의 결속이 강화되고 친일경찰의 지배가 확고하게 되며 국가건설과정에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자주적 흐름이 배척된다>

10월항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10월항쟁이 친일경찰과 관료가 준동하게 된 기회를 주게 되고 미군정이 친일파를 권력의 파트너로 삼게 된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언급한다. 이는 매우 앞뒤가 바뀐 평가이다. 반대로, 미군정이 친일경찰과 관료를 파트너로 삼아 해방 후의 우리 국민의 자주적 흐름을 철저히 배제하고 와해시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저항이 발생하였으며 이의 총화가 10월항쟁이다.

해방이 되자 연합국인 미군을 조선민중은 절대적으로 환영한다. 대구에서도 좌, 우 가릴 것없이 모든 정치세력과 시민들이 미군을 환영한다. 그들끼리 먼저 미군환영하기 경쟁을 벌인다. 심지어는 대구에 진주한 미군정의 도공보과장 던컨은 &lsquo;환영 범람에 경고&rsquo;하는 이색성명을 낸다. 이 경쟁에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소위 좌익적 성향을 지닌 단체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처음에는 일본경찰에 치안을 맡기더니 일본 경찰 철수 이후에는 친일 경찰에게 치안을 담당케한다. 미군정은 이러한 물리력을 바탕으로 애국세력을 배척하고 또 그들을 좌익성향으로 규정하여 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탄압하고 친일세력 중심으로 권력을 편성해나간다.

만약 미군정이 &lsquo;군사물리력&rsquo;이 아니라 &lsquo;정치력&rsquo;으로 자주적 흐름을 회유하고 제도 내로 편입하고자 시도하였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 대구에서나 농촌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지역의 지도자, 애국자, 청년, 농민조직, 노동조직, 좌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친일파를 배제한 상태에서 여러 세력이 연합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중앙좌익에 일방적 지시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인민위원회의 중앙 지도자인 여운형, 조만식 역시 좌익운동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박헌영과는 정적의 관계였다. 만약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이들 중 좌익의 정치력을 약화시키면서 대다수의 지역지도자, 애국자, 청년, 농민, 노동자들을 제도 내로 편입시키고자 시도하였다면, 이를 보장하는 민주적 선거와 통치를 시도하였다면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30대 나이에, 전쟁조직의 경험밖에 없는 군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쟁에서 형성된 적-아 개념으로 통치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의 명언인 &lsquo;정치는 생물&rsquo;이라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김 구선생이 가진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조차 용납할 수 없어 개인자격으로 귀국시켰을 정도였으니…

 

3.10월항쟁의 촉발점, 대구항쟁

<항쟁 발발의 원인>
어떤 역사적 사건은 근본적 원인과 직접적 계기로 인해 발생한다. 어떤 계기를 통해 근본 원인이 폭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0월항쟁의 근본적 원인은 &lsquo;미군정의 일방적 권력재편성&rsquo;과 &lsquo;해방공동체&rsquo;와의 대결이 근본적 원인이며 그 대립은 미군정의 식량정책을 계기로 폭발한다.

8.15해방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공동체를 형성한다. 그 공동체의 기본은 친일청산을 바탕으로 한 자주권력의 형성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해방공동체의 내부 동력을 일체 무시한 채, 이들이 버린 친일파를 권력의 중심에 세우고자 한다. 미군정의 이러한 정책은 해방공동체와의 정면대결을 불가피하게 했다.

이러한 태도는 식량정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해방공동체 내부 실정을 충분히 파악하거나 내부세력과의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식량 자유시장제도를 도입하였고 그 결과 식량가격 폭등(약 40배 가격폭등)과 품귀 현상이 일어난다. 이번엔 또 일방적으로 식량강제수집과 배급제를 선포한다. 강제수집과 배급과정에 친일경찰과 관료를 개입시킨다. 수집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배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친일경찰과 관료들의 횡포와 폭력은 일제시대를 방불케하고 민중들은 기아에 시달린다. 마침내 민중들은 항쟁에 나선다.
<촉발계기-대구항쟁>
미군정의 일방주의와 식량정책의 대실패는 이남 지역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이 분노의 숲에 불을 던진 역할을 하게 되는 대구항쟁이 1946년 10월에 발생한다. 그 시작은 10월 1일 노동자파업에 대한 경찰 발포로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구시민들은 분노한다. 다음날 시청 앞에는 기아데모(굶주린 부녀자들이 쌀을 달라고 하는 시위)가 열리고 대구역 앞에는 어제의 노동자들이 재집결하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십수명이 사살당한다. 마침내 삼덕동을 중심으로 하는 학원가에서 분노가 폭발한다. 대구의전(현 경대의대) 학생들을 선두로 삼덕동에 밀집된 남녀 중고등학생이 총궐기하여 시민들과 함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이제 대구는 권력이 시민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성난 시민들은 친일경찰과 친일지주 및 고리채부자들의 집을 습격한다. 달성공원에서는 빼앗은 물건을 모아놓고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야말로 해방구가 연출된 것이다. 대구의 해방구는 다음날 미전술군이 대구경찰서를 접수하면서 종료된다.

 

이 과정에서, 당시 해방공동체 내에서 상당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던 소위 좌익의 지도력은 관철되지 않았다. 좌익 지도자들은 사태수습을 위해 폭력 자제를 외쳤지만 성난 시민들은 이들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그만큼 이 항쟁은 자연발생성이 강하였으며 그 확산과정 역시 너무나 신속하고 폭발적이어서 누구의 지도력도 관철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모순의 폭발이었다.
<항쟁의 확산>
대구의 무장 시위대는 차량을 타고 경북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하면서 시위를 선동한다. 칠곡, 약목과 영천으로 번지고 선산 등 경북 전역으로 확산되다가 경남으로 충북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마지막 전남에서 불꽃을 태운다. 항쟁이 대구를 벗어나서부터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래서 이 항쟁을 농민항쟁, 추수봉기라고도 한다. 브루스커밍스의 기록으로 보면 전국 80여개 군에서 항쟁이 있었다(이는 당시 미군정 및 경찰 보고서에 근거한 것이며, 사실상 이남 전역에 항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6년 12월말까지 항쟁은 전국에서 계속되고 10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 규모와 민족사적 맥락으로 볼 때 갑오농민전쟁에 버금가는 우리 민족사 2대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항쟁의 좌절>
미군정은 항쟁지역에 미전술군과 경찰을 파견하여 진압한다. 미전술군이 주요 지역을 점령하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민보단 등 극우폭력세력이 주민들을 무단적으로 탄압한다. 미군정은 경찰과 극우세력을 동원하여 진압에 성공함으로써 이남 전지역에 대한 안정적 통치의 물리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진압과정의 무단성으로 인해 민중들에게 깊은 원한을 사게 된다. 미군정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존중했던 국민들은 친일경찰과 폭력배를 앞세운 그들의 통치의 본질을 온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애초 계획성과 지도성이 부재했던 항쟁은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자주적 흐름은 상황에 이끌려가다가 미군과 경찰에 의해 대탄압을 받아 와해된다. 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남로당의 박헌영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만, 그런만큼 무단적 탄압으로 인한 국민의 원한은 깊어져 이후 큰 비극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즉 미군정은 더욱 경찰물리력에 의존하게 되고 국민들의 원한은 그만큼 커져만 갔던 것이다. 급진세력은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사실상 내전이 일어난다. 이는 제주4.3,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4.10월항쟁, 역사적 비극

만약 우리가 1946년 10월항쟁이 터진 시점에 20대의 양심적인 청년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아직 이데올로기 대립은 없었다. 빨갱이라는 말은 일제시대 때 일본경찰이 독립군 잡기 위해 쓰던 말일 뿐, 그 말을 사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시대였다. 당연히 미군정 하에서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도 없었다(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에 이승만정부에 의해 만들어진다. 10월항쟁은 미군정 포고령에 저촉된 것이다)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좌익활동도 합법적이었으며 큰길에 사무실을 둔 공식 조직이었다. 해방 직후 우익단체가 &lsquo;새나라 지도자감&rsquo;으로 적당한 인물에 관한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그 순서가 다음과 같다.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김일성, 김규식, 안재홍, 허헌, 최용달 순이다. 그러니까 국민들은 좌우익을 구분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도를 중심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친일파 즉 친일로 부를 축적한 자, 친일경찰 및 관료를 배제하고 자주적으로 새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국민들의 소망이었다. 국민들은 미군을 절대 환영하였다. 그들이 우리를 해방시켜주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물론 소련에 대해서도 절대 환영과 감사를 표했다. 좌우단체 가릴 것 없이 그들 조직의 명예고문은 루즈벨트와 스탈린이었다. 신의주에서 말썽을 일으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한 소련보다는 미국이 더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멀리 있는 나라 미국은 우리나라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정학적 해석도 이러한 판단에 가세했다.

1946년에 20대 청년은 &lsquo;냉전시대&rsquo;가 무엇인지 몰랐다. 미국과 소련은 연합군으로써 &lsquo;같은 편&rsquo;이었다. 미군정과 친일파가 주도하여 세운 대한민국이 결과적으로 경제와 민주주의 양면에서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할 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10월항쟁에 함께 참여했던 선후배들이 산에서 활동했고 의리상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지했으며 그 때문에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으로 끌려가 민간인인 자신이 학살당할 줄은 정말 몰랐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이 죽자 그 집안이 풍지박산 나고 그 자식이 연좌제에 걸려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당하였다는 사실은 죽어서도 몰랐을 것이다!

1946년 20대 청년은 오로지 일제와 친일파에 대한 분노와 함께 다시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lsquo;새나라&rsquo;를 만드는데 동참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을 구분하지 않았고 좌익과 우익인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 모두를 존경할 따름이었다.

청년의 눈에는 악독한 친일파가 통역과 행정과정에 참여해 미군정을 꼬득여 정치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나서서 친일파를 반대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미군정에 보여주어 자주국가 건설이 미군의 지원 속에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10월항쟁의 시위대가 미군을 공격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20, 30대 미국 군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lsquo;민의&rsquo; &lsquo;여론수렴&rsquo; &lsquo;민주주의&rsquo; 이런 단어는 본국 시민들만의 전유물일 뿐, 한반도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강경파에 속하는 맥아더와 하지는 트루먼의 평화정책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소련과의 대결에만 열을 올렸다. 미군정은 민의를 짓밟았고 이제 대립은 소수화, 과격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비극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5. 10월항쟁, 복권되어야 한다

먼저 10월항쟁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사람들은 막연히 &lsquo;반공법사건&rsquo;으로 알고 있다. 10월항쟁은 국가보안법위반사건이 아니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군정 포고령위반사건이었을 뿐이다. 또한 그 진상을 밝히는 행위가 결코 &ldquo;…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rdquo;일 수 없다. 그렇다면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어떤 두려움을 느낄 이유도 없다.

제주4.3항쟁은 복권되어 대통령이 사과하고 평화공원을 만들었다. 제주시민들은 아픔을 딛고 제주를 &lsquo;평화의 섬&rsquo;으로 만들기로 다짐하였다. 우리 대구경북 시민에게 모범이 된다 하겠다. 우리 대구경북 시민도 10월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이를 보장할 &lsquo;10월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rsquo; 제정운동을 전개하자.

제주도 4.3유적지를 방문했을 때, 현기영의 &lsquo;순이 삼촌&rsquo; 이라는 소설이 4.3진상규명운동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4.3평화공원에는 강요배 화가를 비롯한 많고 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담겨 있었다. 대구경북에서 문학하는 사람, 예술하는 사람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제1장 서론제1절 문제의 틀과 연구방법

이 연구는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 속에서 1946년 10월에 발생한 10월 인민항쟁【주】의 구체적인 전개과정과 성격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전국에 걸쳐 발생한 이 항쟁 전체를 한 논문 안에서 심도 있게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10월 인민항쟁이 비롯되었던 경북만을 주대상으로 하였다.
해방정국의 상황의 대단히 복잡하였고 복합적이었음을 익히 알려져 있다. 10월 인민항쟁 역시 해방적국의 상황이 국면적으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역시 대단히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따라서 10월 인민항쟁이 해방정국이라는 전체적 상황 속에서 점하는 위치를 정확히 인식 하는 것이 분석의 선결적인 전제이다. 도식적이고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다음과 같이 해방정국 속에서의 10월 인민항쟁의 위치를 표시할 수 있다(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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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1) 해방정국속의 10월 인민항쟁의 위치
10월 인민항쟁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차원, 구조적인 차원, 그리고 변혁운동 차원 등의 3차원적인 인식이 요구된다.
첫째, 10월 인민항쟁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역사적인 차원을 통해서 살펴보면, 일제지배의 유산으로 남겨진 한국사회의 잠재적 균열구조(예컨대 지주-농민, 부일 세력-대부분의 피착취 민중 또는 민족해방투쟁세력 등). 일제지배가 민중 개개인에 가한 착취(예컨대 공출 징용 징병 이주 등)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한 민족해방투쟁세력의 분질화, 식민세력과 강력한 국가기구의 유산, 그리고 일제 이전부터 존재해 온 지역적인 저항의 전통 등 다양한 요인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직·간접적으로 해방정국에, 나아가 10월 인민항쟁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10월 인민항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역사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이 논문의 주된 대상이 경북이라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1946년에 발생한 한 사건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세계정책에서 한 지역의 일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구조적인 여러 수준과 연관을 지닌다. 즉 미국을 대변하는 미군정이 직접 지배를 실시하고, 이러한 가운데 중앙의 정치상황이 전개되고, 사회경제적인 상황도 열악한 가운데, 10월 인민항쟁의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수준은 곧 국제정치적 수준, 국내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수준, 일 지역의 사회경제적인 수준 등을 일컫는 것이며, 다른 시각을 통해서 본다면 민족적 차원의 문제와 계급적 차원의 문제를 일컫는 것이다. 경북이라는 한 지역의 상황이라고 할지라고, 당시 경북의 상황은 경북 미군정청의 지배, 중앙정치상황의 영향과 중앙 좌익지도부의 영향, 경북 자체의 정치적 상황 경북 자체의 사회경제적 상황 등 제 수준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0월 인민항쟁이 이러한 전체 구조와 밀접한 관계 하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 변혁운동적 차원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변혁’이란 포괄적 용어는 적어도 타민족의 지배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적’노력과 사회구조를 변동시켜는 ‘혁명적’시도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일제 이전의 운동사적 전통과 일제 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의 맥락과 해방 직후의 변혁운동적 실상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해방 직후의 변혁운동은 좌익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의 해방 이후 8년간의 변혁운동의 지도세력인 좌익의 지도부와 변혁운동이 동력인 민중 사이의 관계, 중앙지도부와 일 지역 지도부 사이의 관계 등이 분석되어야 한다. 요컨대, 변혁운동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10월 인민항쟁의 구체적 성격이, 즉 소용인가, 폭동인가, 아니면 인민의 항쟁인가의 문제가 구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차원, 구조적 차원, 변혁운동적 차원 자체를 구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한 차원들을 일정하게 고려하면서 경북지역에 있어서의 10월 인민항쟁의 전개과정 자체와 그 성격을 중심적으로 분석하資?한다. 따라서 政治史的 연구의 성격을 지니며, 현재의 연구수준이 사실확인 작업조차 미미한 점을 고려하여 무리한 이론을 적용하기 보다는 사실 자체를 재구성하고 그 성격을 확인하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이상에서 말한 문제의 틀과 연구방법을 제시하고, 기존의 연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 논문이 구명해야 할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10월 인민항쟁의 촉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중앙 좌익지도부의 노선투쟁 및 분파투쟁의 영향과, 대구에서의 9월 총파업을 분석할 것이다. 제3장은 이 논문의 본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경북항쟁의 구체적 전개과정과 성격과 결과를 분석할 것이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논의에 바탕 하여 결론을 끌어내고자 한다

제2절 기존의 연구 및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기존의 연구
①B. Cumings 의 연구:커밍스는 10월 인민항쟁을 지방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조직적 미숙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으로 설명하고 있다.【주】 이러한 커밍스의 분석은 일면에서는 타당한 설명이 되겠으나, 10월 인민항쟁의 전체적 성격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구체적으로 커밍스의 분석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항쟁단위가 일개 군이나 일개 지역 이상이 아니고 ‘지방적’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항쟁이 발생하였어도 ‘개개의 농민반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항쟁 시 제기된 여러 주장 행동 등을 보면 광범위한 체제변혁적 요구가 항쟁을 통해서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친일파제거 요구, 인민위원회를 통한 행정과 치안의 요구, 미군정의 반동화 정책에 대한 저항 등은 전국적이고 민중 다수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항쟁의 조직적 단위는 지방적이라 할 수 있지만, 항쟁 시 요구된 많은 주장이 지방적인 주장 이상임을 검토해야 한다.
‘자연발생성’이 커밍스의 분석에는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즉, 커밍스의 분석이 다음의 두 차원을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지나치게 부각되었다. 첫째, 일제지배 하에서 지역적으로 분산 존재해왔던 민족해방운동의 맥락을 과소평가하였다. 일제하에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였던 지방의 인물(주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이 해방직후에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 등을 통하여 다시 표면에 등장하였던 사실에 지적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대체로 해방 직후의 지방의 좌익세력을 지도하였던 것이다.【주】 따라서 이들은 민족해방 투쟁전선에서 15&sim;20년의 경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오랫동안의 투쟁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둘째, 10월 인민항쟁이 전국적 조직성과 체계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계기로 갑자기 폭발한 것은 아니다. 10월 인민항쟁은 해방 직후의 변혁운동적 맥락 속에서 발생臼눼?것이다. 10월 인민항쟁의 분절적인 조직성이 연구되어야 한다.
요컨대 10월 인민항쟁은 주로 일제지배 하의 민족해방투쟁적 맥락과 행방 직후의 사회변혁적 요구 속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10월 인민항쟁의 분석은 일시적인 자연발생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변혁운동적 맥락과 항쟁세력의 분절적인 조직체계라는 측면에서 분석되어져야 한다.
‘농민반란’으로서 10월 인민항쟁을 설명하는 커밍스는 농민 이외의 사람들의 태도를 간과하였다. 항쟁의 구체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농민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민중’이 10월 인민항쟁에 참여하였고 이에 호응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또한 ‘반란’이라는 용어를 통해서는 당시의 민중들이 가슴속에 지녔던 갈망과 심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일제 하에서 맺혀진 원한, 일제의 앞잡이로 실제적인 착취를 담당하였던 친일세력과 일제잔재를 재건시키고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세력의 주요한 세력인 좌익세력을 제거시키려는 미군정의 반동화 정책, 미군정의 사회경제적 정책의 실패 등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반란’이라는 용어로서 적절치 못하① 혁명 – 사회구조의 변동을 지향하며 조직적 체계성을 지닌다.
② 봉기, 항쟁 – 주체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③ 반란 – 지배세력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의미한다.
④ 폭동, 소요 – 주체의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주】 그들은 분절적인 투쟁은 수행하였지만 자신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10월 인민항쟁에 대한 커밍스의 연구는 운동사적 맥락을 과소평가하고 지방적 차원으로 10월 인민항쟁은 비록 조직적인 측면에서 분절성을 극복하지 못하였지만, 민족해방적 의의를 지녔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②김민정의 연구【주】: 김민정은 10월 인민항쟁의 배경으로서 미군정 초기의 정치상황 경제상황 인구동태를 지적하고, 원인으로서 미군정의 대한반도 정책 경제정책 집단심리를 살펴보고, 직접원인이 되는 매개요인으로서 잠재적 불만의 정도 잠재적 불만의 조직화 과거의 폭동 발생 수준을 종합평가함으로써, 경남 경북 전남이 폭동발생지역으로서 잠재성을 가장 많이 지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민정의 연구가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배제하였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분석에 도움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0월 인민항쟁의 변혁운동적 성격을 간과하는 결함을 동시에 지닌다. 또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10월 인민항쟁이 변혁운동의 맥락 속에 위치하지 못하였고, 폭동 잠재성의 확인에만 한정되는 분석에 머무르고 있다.
③ 이종영의 연구: 이종영은 ’10·1폭동’의 성격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해방 상황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어 상대적 박탈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경제체제의 위기와 가혹한 식량공출 모리배의 폭리행위에 의해 생활난에 빠진 농민, 노동자, 실업자 등이 주축이 되어, 공산주의자의 선동을 받아, 지방의 지주, 관리, 경찰의 3자동맹체제를 공격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다.【주】 이 연구 역시 10월 인민항쟁의 변혁운동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고, 당시 민중과 좌익세력 사이의 결합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탓으로 돌리고 있다. 당시의 좌익세력에 대한 평가에 있어 현재의 이데올리기적 경직성을 통하여 파악할 필요는 없다.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 대부분이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하였으므로, ‘애국자’란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었고 그들이 요구하는 주장이 민중들을 대변하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④ 김남식의 연구: 김남식은 10월 인민항쟁의 좌익세력 내의 분파 투쟁에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9월 총파업이 박헌영 체포령으로 인하여 앞당겨 실시되었고, 10월 인민항쟁 중에 공산당이 호응투쟁의 지령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10월 항쟁에 대한 당의 일관적인 지휘가 없었으며 이 항쟁이 공산당 지도부의 파벌싸움에 이용되었고 모험주의적인 극좌투쟁이었기 때문에, 당조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주】
이상의 논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는, 변혁운동선상의 투쟁인가 아니면 자연발생적 폭동인가의 문제와, 중앙의 좌익지도부의 노선 및 갈등과 10월 인민항쟁과의 관계가 무엇인가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당시의 견해

10월 인민항쟁을 둘러싸고 당시의 견해들을 입장에 따라 다양하다.
①John R. Hodge의 견해 : 하지는 10월 인민항쟁을 남조선에 거주하지 않는 외부선동자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았고【주】 조선국가의 적인 선동자들이 동포들에게 범죄적 兇行을 감행하는 파열적 폭동이라고 규정하였다.【주】
②이승만의 견해 : 이승만은 10월 26일에 10월 인민항쟁을 이매국적 적들의 살인, 방화, 강탈 등과 모든 비인동적 행동에 유도하여 전국적 대혼란을 일으키어 저의 조국에 우리 2천리 강토를 예속시키려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주】
③김규식의 견해 : 김규식은 10월인민항쟁이 국제적으로 조선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리어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말하였다.【주】
④사회노동당 및 좌우합작파의 견해 : 이들은 양시쌍비론(兩是雙非論)을 내걸고, 군정의 정책이 옳지 못한 데 인민항쟁의 원인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의 수단으로까지 나와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고 말함으로써 미군정과 극좌적 좌익 양자의 책임을 물었다.【주】
⑤대회파의 견해 : 대회파는 10월 인민항쟁을 대중으로부터 전위를 고립시키는&hellip;&hellip; 소아다운 선동이며, 조선공산당 간부파의 이입삼 노선적 과오로 파악하였다.【주】
⑥박헌영의 견해 : 박헌영은 그의 한 논문을 통하여 10월 인민항쟁은, 인민은 생활이 악화되어 굶주림과 아사선상에 있는 가운데 미군정과 친일파 등 반동파의 무력강압정책은 인민들의 분개를 일으켰으며, 북조선의 민주개혁 실시는 커다란 정치적 영향을 주어, 대중적 여론과 평화적 요구의 방법이 당국으로부터 무시됨에 있어서야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인민들이 깨닫게 되어 반동공세에 대 하여 대중투쟁이 반격의 방향으로 발전한 인민들의 영웅적 항쟁으로 규정하고 있다.【주】
이상과 같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10월 인민항쟁을 평가한 견해 이외에, 당시에 나타났던 10월 인민항쟁의 원인으로서 제기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독립노동당에서 발표한 소요사태에 관한 발생원인 분석 : 여기에서는 10월 인민항쟁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주】
악질경찰관, 악질모리배 등의 橫行에 대한 반감
양곡수집상 가혹수단에 대한 반감
수집된 곡류처분에 대한 의구심
비애국적 공산주의자의 모략적 선동
독립지연에 대한 민중반발심의 발작
② 민전의 영남사건사단의 조사한 원인【주】
<사건의 근본원인>
식량부족과 수집식량의 불배급
미군정의 일제시대 악질관공리,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분자 채용
조령모개의 법령과 말단관리의 非法律令
강압정책, 구타, 검거, 투옥, 총살 등
<近因>
파업단의 요구 거부 및 탄압
양곡수집
식량부족
경찰이 군정의 앞잡이고 조선독립의 방해로 인식되어 있는 점

 

③ 韓美공동소요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한 소요의 원인에 관련된 토의 내용 : 좌우합작위원회와 미군측 대표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에서는 10월 인민항쟁의 원인에 관련된 토의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주】
인사문제: 경찰에 淪?반목, 군정 내의 친일파의 침입, 군정에 있어서의 통역관의 영향, 일부 조선인관리의 부정행위, 남조선의 최대복리를 방해하는 선동자.
경제문제: 미곡수립계획, 미곡배급계획, 임금 물가 및 인플레, 전재민의 주택 및 생활문제, 경제회복 지연으로 인한 인민의 실망.
정치문제: 조선임시정부 수립의 지연, 적산관리에 관한 불만, 정당관계, 정부의 이상적 구상(인민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정부, 진정한 애국자로 구성된 정부, 확고한 행정방침, 정부로부터 악질분자 숙청).
④ 조헌영의 견해 : 한민당에 참여하고 있던 조헌영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 볼 때 아래와 같은 곳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주】
대구·영천지방에서 경찰의 탄압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경찰이 무기력하고 불충실하였다.
하곡수집이 부분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하곡수집의 비율과 폭동지역이 불일치하고, 농민 뿐만 아니라 공장노동자와 학생이 다수 참석하였다.
극렬파괴분자의 선동모략이 있었다.
그는 이상의 사항을 고려할 때 다음의 조건을 지닌 지역일수록 사태가 악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좌익세력의 강한 곳
우익세력이 약한 곳
경찰이 무력한 곳
주민의 성질이 포악한 곳
요컨대 조헌영의 견해는 ‘우익과 경찰이 약한 곳’에 주목하고 있고, 이상의 네 특징이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이 대구라고 보고있다

 

제3절 문제의 제기

 

경북지역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하여 10월 인민항쟁을 분석하고자 하는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첫째, 10월 인민항쟁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하였는가를 확인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10월 인민항쟁에 대한 사실확인의 작업조차 미약한 현재의 연구 상황에서, 10월 인민항쟁의 구체적인 모습을 재구성하는 일이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사실확인에 바탕 하여 10월 인민항쟁 전개의 지역적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10월 인민항쟁이 발생한 지역들 간의 차별성은 역사적 제 요인의 영향, 당시 미군정의 정책의 지역적 차이, 좌우익 간의 갈등과 역량 관계, 교통과 지리적 요인의 영향 등 의 여러 사항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며, 10월 인민항쟁의 파급형태를 규명해주기 때문이다. 10월 인민항쟁 연구의 주요한 의미중의 하나는 해방 직후 각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지방정치의 특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광범위하게 야기되었던 지방의 민중적 열기의 모습을 해방 직후를 제외하고는 한국역사상 거의 前無後無한 현상이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일로서 10월 인민항쟁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10월 인민항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10월 인민항쟁을 자연발생적 폭동으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변혁운동선상의 운동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① 참여자 및 호응자의 규모를 확인하여 이 항쟁이 ‘소수의’ 선동자들의 폭동인지 ‘전민중적’ 또는 ‘전인민적’ 항쟁이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하며,
② 항쟁과정에 있어 조직적인 모습은 어떠했으며 폭동적 성격은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규명하고, 중앙의 노선갈등 및 분파투쟁과 관련하여 10월 인민항쟁이 해방 이후 8년사에 있어서 어떠한 변혁운동적 맥락을 지니는가를 구명하고자 하며,
제2장 10월 인민항쟁의 촉발

 제1절 중앙 좌익세력의 노선갈등과 분파투쟁의 영향

 

경북의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주체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양 사건에 영향을 미쳤던 중앙 좌익세력의 내부갈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양 사건의 발생과 전개는 좌익세력의 내부갈등의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전국적인 수준에서 인민위원회와 각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준국가적 체제를 수립한 좌익세력을 모스크바삼상결정의 찬탁문제로 인하여 잠시 그 세력확대가 주춤했다. 그러나 미소공위회담의 개최로 다시 기세를 올렸던 좌익세력은 미소공위의 결렬과 정판사위폐사건을 계기로 가중되었던 미군정의 직접적인 탄압으로 인하여 새로운 대응전략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더불어 3당합당문제를 둘러싸고 좌익세력 내의 각 분파들의 갈등은 현재화되어 가고 있었다.
우선 좌익세력의 내부갈등을 살펴보면, 미소坪㎱?결렬과 미군정의 직접적 탄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익합작을 추진하고자 하는 온건노선과 신전술로【주】 표현되는 박헌영 중심의 강경노선 사이의 노선갈등과, 3당합당을 둘러싼 박헌영파의 反박헌영파의 갈등이 중앙 좌익세력의 중심적인 내부갈등이었다. 그러나 내부갈등이 주요한 두 내용인 노선투쟁과 분파투쟁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고, 대체로 보아 강경노선은 박헌영파와, 온건노선은 反박헌영파의 중첩이 되었다.
한편 조선공산당 내부만을 살펴보면, 박헌영파인 간부파와 反박헌영파인 대회파 사이의 갈등은 분파투쟁적 성격이 더욱 강한 듯하다.【주】 3당합당을 둘러싸고 당대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대회파에 대하여 박헌영은 대회파의 중심인물인 이정윤을 당으로부터 제명하고 김철수 서중석 강진 문갑송 등에 대해서는 무기정권을 결정함으로써, 그 여파는 중앙으로부터 지방당까지 확대되어 당은 크게 두 갈래로 분열되었다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발생의 지역적 특성과 관련해서 볼 때, 조선공산당의 이러한 분열은 좀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反박헌영파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부에서 박헌영 및 그의 동료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전국적인 회의(당대회)를 준비하여 위하여 1946년 9월 19일에 한 회의를 개최하였고 9월총파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9월 28일에는 전남조선준비대회를 가졌다.【주】 28일의 회의를 살펴보면, 전국에서 약 400명의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철도파업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참하여 경남 전북 충남 충북에서 182명의 대표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의 공산주의자들을 이끄는 윤일을 의장으로 하여 가까운 장래에 당대회를 열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주】 철도파업중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모인 이 지방대표들은 대회파세력의 전국적인 분포를 시사해준다.【주】 여기에서 경북과 전남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경북의 총파업과 인민항쟁이 그리고 전남에서 인민항쟁의 격렬하였다는 사실 사이에 상당한 관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남로당대구지부 결성예정일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당대회준비위원회 9월 28일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사실도【주】 경북에서 박헌영파의 세력이 강했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대회파의 한 주요한 지도자인 김철수의 근거지인 전북의 공산당지부는 완전히 분열상태에 빠졌다

 

제2절 대구의 9월 총파업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노동운동의 추세는 어떠했는가? 해방 직후의 노동운동은 노동지자주관리운동, 산업건설협력방침, 쌀획득투쟁 등을 통하여 미군정에 대한 협조와 투쟁이 번갈아 가면서 또는 중복 되면서 진행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에서 선전술을 채택한 시기를 전후하여 전평에서는 파업회피지령을 취소하였고, 뒤이어 전평기관지에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하는 글을 게재하였다.【주】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이중성이 있었던 이전의 투쟁과 비교해 볼 때 강경노선으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공산당에서 취해진 강경노선이 전평지도부에 미친 영향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강경노선으로의 변화는 9월 총파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G-2보고서에 의하면,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지배집단은 고조되는 경제위기를 이용하는 당내의 反박헌영파의 도전에 치명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 박헌영이 9월 9일에 총파업을 지시한 것으로 되어있다.【주】 이 날자는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린지(9월 7일) 이틀 후의 날자이며, 좌익계 탁??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의 3개 신문이 포고령 위반으로 정간당하지(9월 6일) 사흘 후의 날짜였다.
9월 14일에 서울철도국의 경성공장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① 가족수당 1인당 600원
② 물가수당 2,000원
③ 일급제 반대
④ 식량배급(종업원 4합, 가족 3합)
⑤ 해고 절대 반대
⑥ 임금인상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성의 있는 답변이 없자 9월 232일에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선두로 전철도종업원 4만명이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에 뒤이어 25일에 서울의 출판노조가 일상적 문제인 식량 문제 이외에 정치적 요구 조건인 민주주의 애국자에 대한 지명체포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으며,【주】 경전도 파업할 기세를 보였다.
이 논문에서는 전국적인 파업상황이 주된 분석대상이 아니므로, 주로 대구지방의 파업 전개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대구의 파업상황이 격렬했고 10월 인민항쟁과 연결되었던 원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대구지방 총파업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주】
9월 23일 하로 3시 경부터 대구철도기관구 노조원 1,000여명이 파업에 돌입하여 대구철도쟁의단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24일에 간부와 서무관계직원 이외에는 전부 결근을 함으로써 파업을 계속하였고, 파업설명서를 통하여 일급제 반대, 임금인상, 쌀배급 증대, 해고 반대, 급식불활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울의 운수국은 파업 이전에 진정이 있어야 하는 데 이것이 없으니 상담할 여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한편 서울철도국쟁의단 본부에서는 교섭결과 예측 불능, 본 재의부는 만단준비완료, 전국지부에 지령을 발한다. 동무들의 건투를 빌고 최후까지 일사불난을 맹서하자라는 격려전문을 보내왔다. 대구철도쟁의단이 뿌린 전단(쟁의단 발표 제2호)은 그들의 구체적인 불만을 잘 보여준다. 그 내용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고 없이 단행된 철도파업은 불법이라는 러치장관의 언급을 반박.
기차는 인민에게 줄 쌀을 싣고 다니지 않는다. 滯貨가 산적한 중에도 소금과 쌀이 없으면, 태평양에서 쓰고 남은 罐詰, 썩어 빠진 강냉이 등만이 있다.
전라도에서 사오는 2-3말의 소량의 쌀도 압수한다.
9월 25일 철도파업투쟁위원회가 파업에 관한 일체의 교섭건과 계약권을 전평에 일임할 것을 결정하고 27일에남조선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가 등장하여 윤장혁이 그 책임자로 등장함에 따라, 대구철도파업의 성격은 민생문제로부터 정치문제화하였다. 또한 파업은 더욱 확대되어 25일 대구우편국의 파업을 시발로 하여 경북도내의 많은 우편국의 들어갔으며, 섬유공장 및 조선중공업대구지부가 파업에 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출판노조도 파업에 들어가 신문발행도 29일부터 중지되었다.【주】
이러한 확대일로의 파업양상을 해결하고자 윤장혁과 해론지사가 27일에 만나 타협을 시도하였다. 윤은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과 중앙의 지령 없이 파업을 중지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고, 반면에 해론지사는 식량문제는 지방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수송문제에 애로가 있고 절대량이 부족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0일에 이르러서는 대구시투쟁위원회의 간판철거문제로 파업단과 경찰의 대립적 기운이 높아져 사태는 돌연 약화되었다.
30일 낮까지 알려진 파업업체와 그 참가자수는 다음과 같으며, 10월 1일 오전 8시에 이르서는 南電 파업에 가담하였다.
① 철도파업 : 1,200 명
② 직물 및 섬유업체 : 단우직물 30명, 동우직물 60명, 대구견직 40명, 일출제사 35명, 대화직물 60명, 편창제사 300명, 신흥제사 700명, 남선타올 100명, 한일 莫大小 50명, 협화직물 50명, 군시제사 300명, 동화직물 70명, 경북직물 18명, 계 1,813명.
③ 우편국 : 대구우편국 460명, 경주우편국 170명, 포항우편국 180명, 안동우편국 50명, 상주우편국 180명, 안동우편국 210명, 계 790명
④ 신문사 및 인쇄소 : 대구시보 30명, 영남일보 30명, 대구인쇄 40명, 경북신문 12명, 계 112명
⑤ 기타 : 조선중공업 130명, 동창산업 50명, 건국철공 150명, 신암철공 30명, 비산동일대 수공업 300명, 계 660명
* 안동우편국이 두 번 기록된 것은 잘못인 듯하다.
이상과 같이 30여 업체와 4,245명이 30일 현재 경북도내의 파업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대구의 파업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의 지령에 충실하였다. 반면에 타 지역의 파업양상은 대구의 파업양상과 상당히 달랐다. G-2 보고서에 의하면, 부산 전주 인천 등의 종업원들은 기꺼이 직장에 복귀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울의 파업이 끝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부산에서는 파업의 조기해결을 위하여 5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서울의 파업자들이 직장에 복귀하도록 하기 위해서 26일 서울로 파견하였다.【주】 이러한 현상은 조선공산당내의 갈등과, 특히 대회파 세력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은 대회파인 윤일의 근거지였으며, 전주는 대회파인 김철수의 근거지였다. 인천에서는 일찍이 조봉암이 박헌영에 반기를 들었던 곳이었다.【주】 따라서 9월 총파업이 적극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곳은 서울과 대구였다. 그러나 서울은 9월 30일 무장경찰 약 2,000 명과 우익계 대한노총, 건청, 독촉 등의 수천명이 철도파업단 본부가 있는 용산기관구를 습격하여 파업을 진압하였다. 그러므로 대구만이 파업이 10월 인민항쟁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구에

제3장 경북의 10월 인민항쟁

제1절 경북항쟁의 구체적 전개과정

 

(1) 대구항쟁
남조선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던 대구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10월 1일을 계기로 인민 항쟁적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대구항쟁의 과정은 해방 이후 대구의 모습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즉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 학원에 커다란 영향력을 지녔던 학생운동, 상대적으로 덜 탄압적이었던 미군정 및 경찰의 태도, 식량정책을 비롯한 여러 정책상에 있어서 미군정의 실패, 전재민 실업자들로 인한 불안정한 기운, 미군정에 대한 시민 대다수의 반감, 경찰에 대한 원한 등이 며칠동안의 과정에 적나라하게 응축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항쟁이 전개되었던 과정, 항쟁에 참여한 계층의 확인, 이들의 요구와 행동을 통해본 항쟁의 성격, 경찰이 특히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된 원인 등을 중심으로 대구항쟁을 고찰하고자 한다.
대구항쟁을 시간적 순서에 다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주】
우선 9월 30일에 대구시 투쟁위원회와 경찰 사이에 간판철거문제로 사태가 악화되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0월 1일 오전 8시에 南電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정오경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를 중심으로 약 1,000명이 대구부청에 몰려들어 쌀을 달라고 야단하며 현관과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오후 1시 경에는 대구역전에 동맹파업단이 집합하여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 간판을 역전 앞 노평본부에 게시하였다. 이 동맹파업단은 운수. 금속. 화학 노동조합 등을 중심으로 한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주축이었다. 이에 대하여 경찰은 수사珦?이하 30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군중에게 해산을 명하고 노평간부와 해산을 절충하던 중에, 군중들이 경찰을 포위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권영석 경찰청장은 무장경찰관 60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나 대구시 투쟁위원장과 교섭을 하면서 해산명령을 발하였다. 그러나 파업원, 공장직공, 일반시민 등으로 이루어진 약 15,000명의 군중들은 무장경찰의 철퇴를 조건으로 해산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오후 6시 경 역전에서 운수경찰관과 운수노조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대구경찰서 수사주임은 3명의 경찰을 대동하고 현장에 출동하였으나 군중들이 수사주임의 두부를 철봉으로 난타하여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리하여 경찰과 군중들은 서로 팽팽히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7시 경에 경찰이 발포하여 군중 속의 1명이 사망하였다. 대부분의 군중들은 흩어지고 약 600명의 노동자들은 노평본부의 사수를 기도하여 경찰과 철야 대치하였다. 10월 1일 밤의 상황을 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주】
모임은 저녁 10시에 해산할 예정이었다. 해산 예정시간 훨씬 이전에 경찰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경찰은 그날 밤, 살기등등 했습니다. 사방에다 총을 갈겨댔지요. 그들이 군중을 해산 시킨 뒤 시체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밤새 총성이 들렸고 학교와 공장에서는 항의 집회가 계속되었다.
10월 1일 하루 동안의 과정은 노동자의 조직적인 활동, 부녀자들의 쌀소동 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들은 갑자기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대맙【??10월 1일 이전에 이미 겪었던 문제들이며, 이제 이러한 상황은 10월 2일 학생들의 참여와 일반시민들의 호응에 의해 대구경찰서가 접수되자 파업지도부 자체에서도, 도한 경찰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폭발하였다

 

10월 1일과 2일 사이의 밤에 공산당 대구책임자인 손기채가 대구의과대학에서 각 학교이 좌익적 교원들과 학생들을 망라하여 집회를 가졌다.
2일 오전 8시 경부터 수천명의 군중이 역전에 집합하여 무장경찰관과 ‘살기등등하게’ 대치한 가운데, 군중은 이제까지 투쟁의 주된 수단이었던 투석 이외에 돌연히 총을 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다라 경찰은 철도선 후면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1,500&sim;2,000명의 학생들은 전날 총탄에 사망한 학생이라고 주장하며 한 시체를 들것에 싣고 대구사범에 모여, 경찰의 난폭한 발포를 제지하자고 외치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들것에 실린 학생 시체는 학생들에 의해서 이 학교 저 학교로 들려 다니며 ‘피 끊는 학도들의 흥분을 高動’ 시켰다.
이에 학생들이 대구서 주변에 모여들어 이를 포위하였다. 오전 10시경 대구사대, 대구농대, 대구의대의 3개학 학생들을 위시하여 각 중등학교 학도 수천명이【주】 대구시를 포위하고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①시민에 대한 발포를 중지할 것.
② 무장을 해제할 것.
③ 애국사상자를 석방할 것.
이러한 상황 하에서 권영석 경찰청장과 미국인 경찰청장이 연설로 시위군중을 진압 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 때에 수명의 젊은 경찰이 ‘학도들이 정열과 요구에 응하여 단연코 경찰복장과 총을 버리고’ 군중 속에 합류하였다. 오전 10시 35분 경에【주】 학생들은 50명의 무장경찰이 지키는 경찰서에 쇄도하여 유치장 문을 열고 100 여명의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서장을 불모로 잡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이에 경찰들은 무기를 던지고 구本町소학교로 피신하였다.
경찰서가 점령당했다는 말이 일반에게 퍼지자 군중들은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경찰들을 잡아 무장해제 시켰고 한 트럭의 경찰들을 잡아서 돌아다녔다. 또한 각처에서 경찰을 상해하였고, 경찰, 도청의 각 부장, 부청경찰관계서기 등의 사택을 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가족을 협박하였다.【주】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경찰은 미군의 명령을 받아 무장경찰 150명을 수만명의 군중이 모인 파업투쟁위원회 본부에 파견하여, 단상에서 ‘아지'(선동) 하는 여공을 사살하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노동자도 사살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군중측 사망자 18명, 중상자 다수, 경관측 사망자 4명이 발생하였다.【주】
한편 미전술군도 투입되어 오후 3시 경에 전차(M-7 mount) 4대와 기관총부대가 출동하여 군중에게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런 가운데 학생대와 미군이 쌍방 교섭하여 학생대는
① 파업단의 합법성을 인정할 것.
② 검속자 전부를 즉시 석방할 것.
③ 무기탄압을 일체 중지할 것 등을 승인 받고 해산하였다. 오후 5시 경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주】
미군의 출동과 계엄령의 선포로 대구시내의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이제 인민항쟁은 대구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에서 밀려난 일부 군중은 환이화물(丸二貨物)의 자동차를 비롯하여 개인소유의 자동차를 탈취하여 각 지구로 진출하였고, 이제 항쟁은 경북 전체로 확대일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2일 하루 동안 전개된 과정을 살펴볼 대 학생들이 가세함으로써 파업단과 경찰 사이의 팽팽한 대치관계와 역(力)관계를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생들의 역량은 해방 직후부터 계속 맹휴를 통한 조직 및 역량 증대의 결과로 보여지며, 대구서의 접수도 경찰이 자제한 흔적은 보이나 보다 기본적으로는 경찰의 힘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러한 조직적 투쟁에 의한 경찰서의 접수는 예상치 않게 대구에 폭동적 상황을 야기시켰다. 다라서 파업지도부도, 경찰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사건이 급진전함에 다라 미전술군의 투입과 계엄령 선포가 뒤따랐고, 이는 대구의 질서를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항쟁을 대구 주변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요컨대,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적 투쟁은 강한 역량에 바탕한 체계적인 것이었지만, 대구서 접수가 보여주듯이 노동자 학생 일반시민 對 경찰사이의 역관계에 있어서 균형의 변화는 대구에서 항쟁을 폭발적으로 확산시켰고, 이제 대응한 미전술군의 투입은 항쟁을 대구 저변 및 경북 전역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대구 시내 중간 계층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이 문제는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대구 항쟁이 소수의 선동자들에 의한 폭동인지, 다수의 민중들이 공감한 ‘민중적’ 항쟁인지의 성격분석에 있어서 중간계층의 태도가 주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선 행정관리들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도청에 있어서, 최고 간부들은 2일에 총사직을 결의하였고, 과장들은 2일에 「시민에게 사과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일반직원들은 3일에 총파업에 들어가
① 제 간부의 무능 무책임을 들어 인책 사임할 것.
② 미국인지사의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③ 일반봉급자의 생활을 확보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부청(시청)에 있어서는 1일 부녀자들의 쌀소동이 있은 후 대부분의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연휴업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통역관들도 파업태세를 보이자 미군정지사는 부장 이상 간부들의 사직을 급하고 직원들의 태업에 대해서는 즉시 직장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여 행정관리들의 움직임은 별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주】
금융기관 회사 등도 자연휴업 또는 파업선언으로 마비상태에 들어갔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파업선언을 취소하고 임시휴업에 들어갔다.【주】
대구시의사회는 ① 경관은 시민에게 발포를 중지하라 ② 동포에게 발포한 경관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는 경고문을 발표하였다.【주】 의사 간호부들은 월급봉투를 파업기금으로 내어놓았고, 의대 교수들은 시계와 의자를 팔아 파업기금을 내어 놓았다.【주】
이상을 살펴볼 때, 의사들은 보다 명백하게 파업 및 항쟁에 호의적이었으며, 관청의 직원들도 지위가 낮을수록 직접 파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관청의 고위직이나 금융 기관들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애매모호한 입장에서 결정을 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대구항쟁의 전개와 성격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항쟁의 파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0월 2일의 대구경찰서 접수는 대구항쟁이 경북전체의 항쟁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될 수 있게 만든 계기로서, 동시에 대구항쟁의 조직적 성격에 폭동적 성격이 첨가되는 계기로서 파악될 수 있다. 즉 대구서 접수라는 계기를 통하여 대구항쟁은 경북항쟁 폭발의 동력이 되었으며, 그 이후의 과정은 좌익지도부 자체【??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환되었던 과정이었다. 항쟁은 이제 대구지도부의 손에서 벗어나 군지도부 및 민중에게 넘어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이 된다 ; 우선 3일에 인민당의 대구책임자인 채문식과 대구시민전 의장인 손기채가 대구방송국을 통하여 냉정히 사태를 수합할 것을 호소하였고, 【주】 다음으로 대구총파업의 핵심적 인물인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 위원장인 윤장혁이 나중에 재판과정에서 ‘파업과 촉동은 다르며 본인은 폭동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라는 요지의 진술을 하였다.【주】
둘째, 참여자라는 측면에서 볼 때, 노동자, 농민, 학생, 일반시민, 다수의 군정관리, 의사, 심지어 일부 경찰까지 대구항쟁에 참여하였거나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미군정 자체, 친일파, 친미세력, 일부 유산계급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구항쟁은 ‘소수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보기 어렵고 대부분의 민중이 참여한 ‘민중’ 봉기 도는 ‘인민’ 항쟁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대구항쟁에 참여한 각 계층의 태도와 요구를 통하여 대구항쟁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항쟁에 참여한 각 계층의 행동양태 및 요구는 중첩적이고 다양하였다. 부녀자는 쌀을 요구하여 부청에 난입하였으며, 노동자는 대구시 투쟁위원회의 지도 하에 조직적 행동을 통하여 임금 및 수당의 인상, 쌀배급의 증대, 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 등의 일상적인 생활난을 호소하였으며, 학생은 경찰의 발포금지 및 무장해제와 애국자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조직적이고 선동적인 행동을 통하여 경찰서를 접수하였으며, 일반시민은 이 모든 주장과 요구에 호응하여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행정관리의 다수는 미군정에 협조를 거부하였으며, 의사들은 경찰의 치료를 거부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경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대구항쟁의 성경이 상당히 복합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대구항쟁에는 일제지배의 유산인 친일파 처단, 미군정의 반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불만, 경제적인 불만과 사회적인 혼란에 대한 반감, 경찰탄압에 대한 저항 등의 제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엉켜 있었다. 그러나 대구항쟁의 경우에는 각 군에서의 항쟁과는 달리, 인민정권의 수립과 인민위원회에 의한 행정 및 치안을 위한 행정기관과 경찰서의 접수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대구경찰서 접수는 경찰의 무장탄압에 대한 대응적 성격을 보일 뿐이다.)
특히 민중의 주된 공격이 경찰에 향해졌던 이유는 경찰이 당시의 제 모순을 상징적으로 대표하였고 민중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배와 탄압의 실제적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경찰은 일제 하에서는 일제의 앞잡이로, 미군정 하에서는 미군정의 앞잡이로 행동함으로써 민중이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원한의 대상이었다. 이 원한은 일제 하의 원한과 해방 직후의 원한이 중복된 이중적인 원한이었다. 민중적 차원에서 볼 대 모든 지배와 탄압의 직접적인 수행자는 경찰이었던 것이다.
9월 23일 철도 노조에서부터 시작된 대구의 총파업과 대구항쟁은 10월 8일에 1,000 여명의 철도 노동자들과 전매국직원의 65%가 직장에 복귀하고 【주】 뒤이어 대구방송국 직원 경북의 각 우편국 직원 전화교환수 등이 직장에 복귀함으로써【주】 표면상 일단락되었다

 

제 2 절 경북항쟁의 특성
(1) 전개과정상의 특징 발생, 파급, 강도

항쟁발생지역

우선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경북지방의 항생발생지역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B. Cunings 의 연구가 있지만 【주】 일부를 수정하여 재 작성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혀진 바에 다르면 경북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한 지역은 다음과 같다.

2

(표 3-1) 경북지역의 10월 인민항쟁 발생도

군청소재지 도는 경찰소재지에서 항쟁이 발생한 곳은 군 전체를 표시하였음
일개 면이나 지서에서 항쟁이 발생한 곳은 그 곳만을 표시하였음
전혀 항쟁이 없었던 곳은 표시하지 않았음

 

항쟁의 파급
10월 인민항쟁이 대구에서의 총파업에서 발단하였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항쟁의 파급은 기본적으로 대구로부터의 거리에 관계가 있지만 대구선동자들의 진출, 지리적 여건 및 교통, 통신, 각 군에서의 경찰 및 우익세력의 강력성, 좌익세력의 강력성, 사회경제적인 불안전성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첫째 대구선동자들이 진출한 군들은 대체로 군중들이 선제공격의 이점을 지녔고 항쟁이 보다 격렬하였고 신속히 발생하였다. 대구선동자들이 진출한 군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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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2) 대구의 선동자들이 진출한 군
대구에서 선동자들이 내려간 군들은 모두 항쟁이 발생하였으며 항쟁의 강도가 높았다.
(표 3-5 참조).
둘째 지리적 여건과 교통도 항쟁의 파급에 영향을 미쳤다. 경북지방의 지리적 여건과 교통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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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3) 경북지역의 지리적 여건과 교통
지리적 여건과 교통의 문제는 철도, 산맥, 논농사 배율을 대표적 지표로 선택하였다. 개괄적으로 말해서 교통이 편리構?산맥에 의해서 항쟁의 파급이 저지되지 않은 지역에서 항쟁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영주군 영덕군 청송군 등은 태백산맥에 의해서 항쟁의 파급이 저지되었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교통과 지리적 여건이 항쟁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며,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 뿐이다. 교통은 또 한편 경찰이 항쟁을 진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의 경찰대의 신속한 이동은 항쟁의 진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논농사배율은 산악지역과 평야지역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된다. 따라서 논농사비율이 50% 이하인 지역은 산악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산악지역이라는 여건은 빈곤, 농민 운동적 전통의 부족, 군중들의 집합의 곤란성 등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어 항쟁의 강도를 떨어뜨리거나 항쟁이 발생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주】 예외적으로 봉화군의 항쟁이 어느 정도 강도를 지닐 수 있었음은 예천군과 영주군의 영향과 일제 하에서부터의 농민 운동적 전통 (적생농조)이 강했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셋째 통신의 영향도 10월 인민항쟁의 파급에 영향을 미쳤다. 항쟁의 파급은 구두에 의해서 확산된 반면, 경찰의 통신망은 경북의 주변에 있는 군들이 소요에 사전대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항쟁에 미처 대비를 못하였거나 일부 경찰이 대구에 지원나간(고령, 군위) 대구 주변의 군들이 갑자기 군중들의 습격을 받은 반면에, 경북의 외곽지역의 군들은 사전대비를 하여(안동, 상주, 영주, 문경, 봉화) 사전에 주모자급을 검거하거나(안동) 서원을 본서에 불러 모아 총기탈취를 방지하고 경찰서나 읍내만을 지켰다(예천, 영주, 봉화). 외곽지역의 군에서 경찰보다 늦게 정보를 들은 좌익들은 선제공격이 이점을 향유하지 못했고 따라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하려 했던 군들(영덕, 영주)도 있었다.
넷째, 항쟁의 파급에 영향을 미친 한 요소로 각 군의 경찰 및 우익세력 대 좌익세력 사이의 힘의 관계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관계는 항쟁의 발생강도와 밀접히 연관되는 것이지만, 항쟁의 파급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경찰과 우익이 강했던 안동군은 군위군 의성군을 통해 파급되는 항쟁을 중도에서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반면에 좌익세력이 강했던 예천군은 칠곡군과 선산군의 강력한 영향과 군위군과 의성군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항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항쟁의 강도
항쟁의 강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도의 정도를 분류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비교적 단순화시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미발생:청송군,영양군,안동군
② 저강도:부분적인 면에서만 항쟁이 발생한 지역-영덕군,상주군,문경군
③ 중강도:항쟁이 분산적으로 발생하였거나 경찰서 소재지에서만 발생한 지역-영일군,김천군.
④ 고강도:항쟁이 다수의 면에서 발생하였지만 경찰서를 접수하지 못한 지역-봉화군, 영주군,예천군, 청도군【주】 경산군, 고령군
⑤ 최고강도:경찰서를 접수한 지역【주】-대구·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의성군, 영천군, 경주군.
항쟁의 강도는 기본적으로 경찰 미군 우익 대 좌익 사이의 힘의 관계에서 결정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항쟁의 파급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항쟁의 강도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특별히 주목할 요소는 사회경제적 불안정성과 대구로부터의 선동자의 진출 여부 등이다. 왜냐하면 대구주변의 항쟁의 강력성을 폭동적 성격의 강력성으로서 앞의 두 요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표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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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5) 경북항쟁의 지역별 강도

 

항쟁의 강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이 주목된다.
우선 미군정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은 대구를 제외하고는 항쟁이 비교적 약하게 발생하였다(김천군 안동군 영일군). 이것은 미군정중대의 주둔 자체가 항쟁을 억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해방 직후에서 10월 인민항쟁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우익과 경찰이 힘을 회복하게 미군정이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지역에서 10월 인민항쟁 이전에 이미 우익 및 경찰 대 좌익의 갈등이 현재화 되어 많은 좌익들이 검거되었다. 따라서 항쟁이 보다 강도 있게 발생한 지역은 미군정중대의 주둔지를 사이에 위치한 군들이다(대구는 제외).
둘째 대구주변지역은 거의 최고강도를 나타냈으며, 항쟁이 발생한 경북의 외곽지역(영주군 봉화군 예천군 경주군)도 비교적 고강도를 나타냈다. 대구주변의 군들은 대구항쟁의 즉각적인 영향권 안에 있었고 사회경제적인 제 요인에 의해서 불안정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나타낸 것이라 판단된다. 외곽지역은 외곽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농민 운동적 전통(적색농조)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강도 높은 항쟁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특히 북부의 영주군 봉화군 예천군은 안동군에 의해서 항쟁의 파급이 차단되었어도 고강도의 항쟁을 보였다).
셋째 10월 인민항쟁시에 항쟁이 상대적으로 불완전하게 전개되었거나 (경주군 영덕군) 발생하지 않은 (영양군) 특정지역에서는 후일에 폭발하는 추세를 보였다. 우선 경찰서를 접수하였으나 예상보다는 항쟁이 격렬하지 않았던 경주군의 경우를 보면, 1947년 5월 1일에 1,000여명의 군중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주】 즉 1,000여명의 군중이 적기가를 부르며 안동리 장터로 시위행진 할 때 경찰이 해산하려 하자 충돌리 생겨 경찰 2명이 즉사하였다. 경주경찰서는 포항서와 경북경찰청에 응원을 요청하자 무장경관이 출동하여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결과 100여명이 기소되고 민중측 사상자 다수가 발생하였다.
영덕군의 남정면에서도 나중에 폭발하였다.【주】 즉 1947년 7월 15일에 前 민청원을 포함한 좌익단체원 약 400명이 남정지서를 둘러싸고 폭동을 일으킬 기세를 보였고, 이에 대하여 본서의 응원대가 내도하여 해산하려 하자 충돌이 발생하였다. 군중들이 지닌 프랑카드에는
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길 것.
② 하곡수집 절대반대

③ 악질경찰관 타도 등이 적혀 있었다. 충돌의 결과 군중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하였다. 영양군에서도 1947년 5월 31일에서 6월 1일 사이에 영양면에서 군중 약 700명, 청기면에서 군중 약 900명, 석보면에서 군중 약 800명, 그리고 입암면에서 군중 약 1,300명 등이 영양경찰서와 석보지서 및 입암지서를 습격하려 하였다. 경찰이 발포한 결과 민간 1명이 즉사하였다. 【주】
요컨대 항쟁의 강도를 살펴볼 때 대구를 제외한 미군정 주둔 지역에서는 항쟁이 비교적 약하였거나 발생하지 않았으며, 대구와 대구주변군들에서는 높은 강도를 보였고 외곽군들도 비교적 높은 강도를 보였으며, 10월 인민항쟁시 항쟁이 불완전하였거나 발생하지 않은 일정 군들에 있어서는 후일에 항쟁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경북항쟁의 발생.파급.강도라는 측면을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경북지역의 각 군을 다음과 같이 범주화할 수 있다.(표 3-6)
① 항쟁의 핵심지역 : 좌익조직이 강력했고, 사회경제적인 불안정성이 심하였고 9월 총파업이라는 항쟁의 뇌관을 가진 지역이다. 대구와 달성군이 이에 속한다.
② 폭동성 항쟁지역 : 대구에서 선동자들이 진출하였고 군중들이 선제공격의 이점을 지닐 수 있었고 사회경제적인 불안정성이 높았던 지역으로서, 항쟁이 강력하게 발생하였던 지역이다. 영천군 칠곡군 성주군을 비롯하여 고령군 경산군 경주군 청도군 군위군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항쟁시 즉시 파급되었으며 비교적 폭동적 성격이 많이 나타났다.
③ 조직적 항쟁지역 :좌익세력이 강력하여 체계적인 항쟁을 수행하였던 지역으로, 선제공격의 이점을 지녔던 선산군 의성군과 경찰의 사전대비로 인하여 이러한 이점을 지니지 못했던 예천군 영주군 봉화군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이 지역은 일제하 후반의 적색농조조직 지도자들의 영향이 컸던 지역이다. 항쟁이 강력하였어도 폭동적 성격이 아닌 조직적 항쟁의 모습을 보였다.
④ 우익강세지역 : 인동군 김천군 영일군이 이에 속하며, 상주군과 문경군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군들에 있어서 해방 직후에 좌익도 강력했으나 점차 검거되어 약해진 반면, 후자의 군들을 처음부터 별로 좌익이 강력하지 못한 듯하다. 이러한 군에서는 항쟁이 발생하지 않거나 (안동군), 미약하게 발생하거나 (김천군), 부분적으로 발생하거나 (문경군, 상주군) 군 주변에서 주로 발생하거나 (영일군) 하였다.
⑤ 지리상의 항쟁 미약지역 : 영덕군 영양군 청송군 등이 이에 속한다. 태백산맥에 의해서 항쟁의 파급이 저지되거나 완화되었다. 그러나 군 자체내의 좌익세력의 강도에 따라서 각 군의 양상은 달랐다.
제 3 절 경북항쟁의 결과
(1) 경북항쟁의 진압

대구에서의 항쟁의 미전술군의 투입에 의해서 진압이 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대구의 항쟁이 경북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경북의 경찰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타도의 경찰, 미전술군, 파업파괴단, 국방경비대(충남), 각 지방의 우익단체 등이 동원되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항쟁에 대응하여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대구에서는 10월 2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의 주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 이미 2일에 발표된 계엄령을 재차 확대 포고하는 것이었다”);’>다. 【주】
① 포고 1호(10월 2일) : 계엄령 선포, 경찰에 복종할 것. 10인 이상의 집합과 회의 금자, 야간통행금지(오후 7시 ~ 오전 6시), 화물자동차 및 제 운송기관 사용금지(식량배급 제외) 등.
② 포고2호(10월 3일) : 무기반화, 관리.경찰의 석방, 가옥 재산의 파괴 금자, 가옥약탈과 재산의 불법반출 금지, 과격한 행동은 군대력으로 방지 등.
③ 포고4호(10월 4일) : 화기, 무기, 탄약 등의 반환.
④ 포고5호(10월 6일) : 미육군 제6부대 제 1연대 지역에 있는 대구부 달성군 경주군 영일군에 1946년 12월 2일자 *로 계엄령을 선표.
이 이외에도 6일에 계엄사령관 파쓰 대좌 명의로 경북 전지역에 야간통행을 금지하는 포고가 발표되었으며, 같은 날 계엄사령관 파쓰 대좌와 군정지사 해론 대좌 공동명의로 ‘개인적 이기적 목적을 가지고 책동하는 과격한 정치, 문화 기타 단체’의 선동에 응하지 말라는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주】
대구의 항쟁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되고 경북만의 경찰력으로 이를 진압하기 어렵게 되자, 10월 3일에 충남에서 400명, 충북에서 300명의 응원경찰대가 파송되어 당시 대구에 있는 400명의 경찰에 합세하였고 【주】 4일 오후 4시에는 경기도에서 400명의 경찰이 추가로 파견되었다. 【주】 한편 제3관구(충남), 제4관구(충북)의 미군도 원조하였다. 【주】 6일에는 교통부 및 수도경찰의 교관들이 인솔하는 파업파괴자 약 80명을 태운 기차가 대구에 도착하였다.【주】 이와 같이 경북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경북에 들어온 경찰력만 해도 약 1100명이 되었으며 제3, 4관구의 미군과 80명의 파업파괴자도 이에 합세하였으며, 충남의 국방경비대도 투입되었다. 즉 이러한 무력이 경북 자체내의 경찰력과 미전술군과 각 지방의 우익단체원들과 합세하여 10월인민항쟁을 진압하였던 것이다. 경북 자체내의 민중의 힘에 기반하였던 좌익세력에 대하여 미군정은 전국적인 경찰과 미군과 파업파괴자들과 일부 국방경비대 등을 동원하여 진압했던 것이다.
항쟁의 진압과정은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진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진압과정의 실상은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략적인 진압과정의 실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항쟁이 가장 심했던 영천 왜관 방면에 우선 경찰이 파견되었고, 나머지 응원대는 3개 방면으로 나누어
① 경주 포항 영덕 방면
② 군위 의성 안동 예천 영주 봉화 방면

③ 성주 선산 김천 상주 문경 등의 방면으로 파견되었다.【주】 B.Cumings는 Brown의 보고를 인용하여 10월 2일과 5일 사이의 긴급한 시기에 다음과 같은 인원의 경찰이 각지에 파견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 성주 100명, 선산 69명, 영천 50명, 경주 75명, 군위 100명, 김천 150명, 왜관 100명, 달성 70명【주】 그러나 각 군에서 항쟁의 진압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상의 설명과, 앞에서의 각 군의 항쟁에 대한 설명과 항쟁이 진압된 시간등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이 항쟁진압과정을 추측할 수 있다.
① 성주 . 왜관 :3일의 자정을 전후하여 충남경찰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② 선산 . 영천 : 대구에서 선산에 파견된 경찰 75명(69?)은 선산의 군중들에 의해서 격퇴되었다. 【주】 그리하여 선산은 추가로 내려온 경기도 응원경찰대에 의해서 6일 새벽에 이르러서야 진압되었다. 영천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 파견된 경찰은 군중들에 의해서 격퇴되었고 일부 경찰은 군중에 잡혔다. 그리하여 영천은 5일 아침 응원경찰대의 재차투입과 대구주둔 미전술군의 투입에 의해서 진압되었던것 같① 3일 대구에 도착한 한 공안국장이 영천에 즉시 경찰을 파견했다고 한 점 (이 경찰투입은 군중에 격퇴된 듯하다), 대구시보, 1946년 10월 24일.
② 5일 아침 투입된 경찰응원대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기술. 대구시보, 1946년 10월 13일.
③ 영천의 상황은 미전술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기술. 내무부치안국, 「대한경찰전사 제 1집 – 민족의 선봉」(1952), pp. 55~56.”);’>다.【주】 따라서 영천의 항쟁 초기에는 경찰 진압에 대한 군중들의 방어가 성공한 듯 하다.
③ 군위 . 의성 ; 충북경찰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④ 경산 . 경주 . 영일 : 경산은 3일 오후에 대구주둔 미전술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경주도 미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었다. 경북의 동부지역인 영천 경산 경주 영일 등은 주로 미전술군의 투입과 계엄령에 의해 진정된 듯하다.
⑤ 김천 : 국방경비대(충남)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수 있듯이, 국방경비대(충남)도 진압에 참여하였다.
⑥ 예천 등 북부지역 : 대구로부터 올라오는 응원경찰대의 도착 이전 동안 이 지역의 경찰들은 자신들만을 지켜냈다. 예천의 진압에는 미전술군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진압과정에서 각 지방의 일부 우익청년단체들은 10.1 사건 관계자를 체포하는 데 협력한다는 명목하에 좌익관계자를 직접 체포 혹은 구타하는 私刑을 감행하였고 좌익관계자들의 家財를 파괴하였다

(3) 경북항쟁의 영향
10월 인민항쟁이 진압되자 가장 큰 피해자는 좌익과 민중이었다. 즉 경북도내의 주요 좌익간부들은 9월 총파업과 항쟁의 주모자로서 검거되었고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일부는 검거되었고 일부는 산으로 도망하였다. 미군정 경찰 우익은 10월 인민항쟁을 진압함으로써 좌익과 민중의 가장 커다란 대중투쟁적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봉기의 성공적인 진압은 국립경찰의 실력과 생존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군정은 군법회의를 통하여 항쟁에 참여한자들을 단죄하였고, 경찰과 우익단체들은 이제 마음 놓고 보복을 할 수 있었다. 항쟁이 있은 이후 1년에 걸쳐 과도한 보복행위가 일부 한국인 경찰관과 극우급조단체들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주】
경찰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서울에서 파견되었다는 군복무차림의 방첩대원들이었다. 이들은 영장 없이 사람들을 대량으로 잡아가두고 구타 등의 私刑을 가했다. 그 밖에도 타도에서 흘러 들어온 우익단체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민들을 괴롭히는 데 「너는 빨갱이」라는 소리를 이용하였다.
우선 10월 인민항쟁의 주모자로서 대구지역 좌익의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좌익사건실록」에서 밝히고 있는 주모자들은 다음과 같다.(표 3-1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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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11). 10월 인민항쟁의 주모자
그러나 실제로 실형을 선고 받은 인물은 윤장혁 징역 5년. 최문식 징역 3년, 김일식 손기채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등이다.【주】 재판과정 중에서 윤광혁과 김일식의 다음과 같은 말은 10월 인민항쟁의 성격의 일면을 잘 나타내준다.

윤장혁 : 파업은 자유합법적인 것이며 폭동은 조선민족이 살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워 나온 결과로서의 사건이다.. 군중은 본인의 명령으로서 좌우할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全) 정권이 우리에게 오지않는 한 불가능하다.【주】
김일식 : 일제시대 왜정에 협력하여 조선사람을 구박하던 사람이 오늘날 우리들을 구형하려 함은 어찌된 일인가? 고로 검찰관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한다.【주】

주모자로서 검거된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경북도에서만 7,400명이 검거되었고, 1947년 1월말경에 이들 중에서 군재에 회부되어 판결을 받은 수형자는 280명이고 미판결자는 260명이여 취조를 마친 자는 약 200명이고 취조 중에 있는 자는 180명으로서, 6,580명은 이미 석방되었다.【주】 검거된 사람들 중 죄가 가벼운 자들은 군정재판에, 죄가 무거운 자들은 특별군정재판(나중에 군사위원회로 개칭)에 회부되었다. 특별군정재판은 보통군정 재판에서의 최고형이 징역 5년까지 밖에 선고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설치되었고 따라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잇는 권한을 지녔다. 특별군정 재판에서, 황점암(40, 구장) 장현중(60, 유곽업) 이 경찰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주】 花園살인사건 문제로 최문학 이광열 이삼택 박학구 이재희 등 5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고,【주】 달성군 하빈면 서장을 살해한 죄로 9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고,【주】 대구의대 학생 공판에서 최무학은 종신징역 남택순은 5년징역을 선고받았고,【주】 달성공원 살인관계로 정남수 현무기 윤삼문 등 3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고,【주】 영천군에서 성재모의 1인을 살해한 죄로 김양성 김성필 김춘생 신범이 정원택 이원만 등 6명이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며 연천군수 살해 사건과 관하여 박봉영 김종영 회상호 3명이 교수형을 언도받았다.【주】 이 밖에도 달성군 성서면의 김춘규 김행국(?)과 왜관의 박명희도 교수형을 언도받았다.【주】
한편 일반 민중들은 검거와 보복을 피하여 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다음과 같은 주민의 당시 회상기에 잘 나타나 있다.【주】

그러나 그로부터 마귀가 이 마을을 찾아왔다는 것은 날이 새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계엄령이 내린 대구지구로부터 응원경찰이 미군병사와 함게 출동해 온 것 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뒷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로부터 밤에는 내려오고 낮에는 산으로 가는 슬픈 생황이 습성처럼 되어갔습니다. 보복당한 그 면서기의 복수행위는 꾸준히 계속되었습니다. 밤낮없는 검거와 수색에서 산으로 도망가다가 溪川가에서 총맞아 죽은 청년도 있었습니다. 폭동에 가담한 농부의 집은 불타고 그 대 피할 길없이 타죽은 늙은이와 어린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지긋지긋한 것은 밤중에 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에 의해 양식을 약탈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또한 폭도들에게 양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그 농민을 체포하고.. 부락민들은 오랫동안이나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패가망신한 농가가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하였다는 사실은 경찰의 진압총책임자인 한종건의 글에서도 확인이 된다. 한에 의하면, 모두 산으로 도피할 것과 검거되면 총살될 것이라 좌익들이 선전하여 대중심리로 현장에서 성원한 사람까지 산중으로 피신 시켰다고 적고 있다.【주】
이와 같이 경북의 좌익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0월 인민항쟁이 있은 후 거의 4개월이 지난 1947년 2월말에서야 대구의 좌익단체들은 사무를 재개하였다.【주】 좌우익이 1946년에는 공동개최하였던 3월 1일의 기념행사는 1947년에는 우익측이 공회당에서 2,000여명 참석하에 거행하였고 민적측은 달성공원에서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다.【주】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좌익세력은 그 조직력을 상당히 손상당했음에 분명하다. 1947년 3.22 총파업시 대구에서는 역기관구 방직공장 2개소 등에서 약간의 동요가 있었고 송신두절이 있었을 뿐이다. 【주】 6개월전 9월 총파업시의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총파업에 비한다면 엄청남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1947년 메이데이 행사도 우익측에서는 5월 1일에 치루었는데 반하여 민전측은 5월 4일로 행사를 연기하였다.【주】 1947년 5월 19일에는 돌연 민청동맹본부가 경찰의 습격을 받아 해산되었고, 8월 13일에는 대구부내 좌익진영에 대한 광범위한 일제검거가 실시되었고, 11월 3일부터는 도내 전역에 걸쳐 좌익간부 일체를 검거하여 7일 현재 332명이 검거되었다.【주】
요컨대 10월 인민항쟁의 결과는 수많은 좌익과 민중들이 일부는 감옥으로, 일부는 산으로, 일부는 지하로 잠적하게 만들었다. 일제 하에서부터 지배당해왔던 민중은, 도 일제에 저항해왔던 좌익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이제 대중적 형태의 항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10월 인민항쟁의 전개와 그 성격에 관한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우선 대구는 좌익세력내에서 박헌영 중심의 강경노선이 반발을 가장 적게 받으며 관철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② 대구에서 수행된 9월 총파업은 대구노동운동의 조직적 역량에 바탕하였고 강력한 경찰이나 우익에 의해서 분쇄되지도 않았고 중앙의 분파투쟁 및 노선투쟁의 갈등으로 인한 분열적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강력하게 수행될 수 있었으며 경북항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③ 대구의 9월 총파업과 연결되었던 대구항쟁은 전개과정 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처음에는 조직적 형태로 전개되다가 2일의 대구경찰서 접수를 계기로 폭동적 형태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대구항쟁은 성격적인 측면에 보면, 대부분의 민중이 참여한 전민중적 성격을 보였고, 참여자들이 표출하였던 제 요구와 행동은 친일파 처단, 미군정의 반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불만,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인 혼란, 경찰탄압에 대한 저항 등의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경북의 농촌항쟁과는 달리 ‘인민’에 의한 행정이나 치안을 담당하려했던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④ 경북항쟁 전체로 볼 때, 경북항쟁의 전개과정상의 특징과 경북항쟁의 성격과 경북항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개과정상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경북항쟁은 대구항쟁의 폭발적인 힘의 영향으로 도 전체에 항쟁이 파급되는 형태로 확산되었고, 이 파급과정에는 대구선동자들의 진출여부, 지리적 여건과 교통. 통신으로 인한 선제공격 및 사전대비의 효과, 각 지역의 경찰 우익 대 좌익의 힘의 비중 등이 영향을 미쳤다. 항쟁의 강도에 있어서는 미발생 저강도 중강도 고강도 최고강도 등 다양한 차이를 보였고, 이는 기본적으로 경찰 우익 대 좌익 사이의 힘의 관계에서 결정되었다. 항쟁의 파급과 강도를 종합적으로 감안할 대, 경북 전체는 항쟁의 핵심지역, 폭동성 항쟁지역, 조직적 항쟁지역, 우익강세지역, 지리상의 항쟁지역 등으로 범주화될 수 있다.
둘째 경북항쟁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참여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북항쟁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참여한 전민중적 성격을 지닌다. 구체적인 요구 주장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북항쟁은 친일파에 대한 원한의 폭발, 미군정의 반동화 정책 및 식량정책에 대한 저항, 인위에 의한 행정과 치안 담당의 요구(대구 항쟁에서는 이 주장이 표출되지 않았다.), 식량문제 및 생활난에 대한 반발 등의 성격을 보였다. 조직성 및 폭동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 전체적인 일반적 추세는 대구에서는 조직성에 폭동성이 가세되었고 남부 지역은 폭동적 성격을 많이 내포했으며 북부는 조직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항쟁단위라는 점에서는 한 지역이나 군 이상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고 따라서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를 띄지 못하였다. 요컨대 경북항쟁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경북항쟁은 민중의 (또는 당시 민중이라는 용어 대신 쓰인 ‘인민회’) 항쟁 (폭동이나 소요가 아닌) 이었다.
셋째, 항쟁의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경북항쟁은 경북지역의 수많은 좌익과 민중들이 일부는 감옥으로, 일부는 산으로, 일부는 지하로 잠적하게 만들었다. 일제 하에서부터 지배당했던 민중은 또 일제에 저항해왔던 좌익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좌익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10월 인민항쟁을 계기로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이제 대중적 형태의 항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 4 장 결론
우선 각 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의 서론에서 필자는 역사적인 차원, 구조적인 차원, 그리고 변혁 운동적 차원을 고려하여 10월 인민항쟁을 그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파악할 것이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또한 기존의 논의가 10월 인민항쟁을 ‘폭동’ 으로 인식하거나 ‘자연발생성’을 부각시키거나 ‘개개 농민반란의 집합’으로 규정하는 사실에 대해서, 변혁 운동선상의 맥락 (민족해방투쟁적 맥락과 사회변혁적 맥락)과 조직역량상의 분절성이라는 측면에서 10월 인민항쟁을 파악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2장에서는 경북항쟁의 촉발과정을 살펴보았다. 경북항쟁의 촉발과정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한 좌익 내부의 노선투쟁 및 좌익 자체내의 분파투쟁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구는 박헌영 중심의 강경노선이 관철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9월 총파업이 시작되자 대구좌익 및 노동운동세력은 대구의 9월 총파업을 조직적으로 수행하여 대구항쟁과 연결시켰다.
제3장에서는 경북항쟁의 구체적 전개과정, 경북항쟁의 특성, 경북항쟁의 결과 등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인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대구항쟁 과정 중 학생들의 대구경찰서 접수는 항쟁을 경북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므로 대구에서의 총 파업과 대구항쟁은 경북항쟁 나아가 전국의 10월 인민항쟁을 야기시킨 도화선과 뇌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것이다. 불은 이미 강경 노선을 취한 박헌영 중심의 중앙지도부가 점화시켰었다. 이제 뇌관은 화약을 폭발시켰고, 그 충격적인 파급효과는 경북의 각 지방의 성격에 따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경북항쟁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우선 전개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항쟁은 우선 대구로부터 강력한 힘으로 ‘파급’ 되었다. 이 파급과정에 대구선동자들의 진출, 지리적 여건과 교통, 통신으로 인한 선제공격과 사전대비, 각 지역의 경찰과 우익 대 좌익 사이에 힘의 관계 등의 요소들이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항쟁의 강도는 기본적으로 경찰 및 우익 대 쩜?사이의 힘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항쟁의 파급과 강도를 고려할 때 경북은 항쟁의 핵심지역인 대구, 달성지역과, 폭동성 항쟁지역인 대구 주변지역과 조직적 항쟁지역인 북부지역과, 우익강세지역인 안동군 김천군 영일군 등의 지역과 지리상의 항쟁미약지역인 태백산맥에 연한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 등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경북항쟁의 성격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북항쟁은 참여지라는 측면에서 ‘전민중적’ 성격을 보였다. 구체적인 주장과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원한의 폭발, 미군정의 반동화 정책 및 식량정책에 대한 저항과 반발, 인위에 의한 행정과 치안의 담당 요고(단, 대구항쟁에서는 이러한 요구는 별로 없었다), 식량문제 및 생활난에 대한 반발 등의 성격을 보였다. 조직성이란 측면에서 경북 전체로 볼 때 대구에서는 조직성과 폭동성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나타났으며 경북북부에서는 조직적 성격이 부각되었고 대구주변에서는 폭동적 성격이 부가되었다. 그러나 항쟁의 지역적 단위는 결코 일 지역이나 군 이상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즉 10월 인민항쟁은 조직역량의 측면에서는 개개항쟁의 전국적 집합이라 할 수 있으며, 전국적인 체계성을 지니지 못하고 조직역량의 분절성을 나타냈다. 요컨대 10월인민항쟁의 성격을 경북지역 중심으로 살펴보면 ‘민중의’ (또는 ‘인민의’ 폭동이나 소요가 아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0월인민항쟁은 진압되었다. 항쟁의 결과는 경북지역의 좌익과 대중의 조직역량의 붕괴로 나타났다. 민중과 좌익의 변화적 요구는 거부되었고 이제는 광범위한 대중적 형태의 운동을 불가능

하게 되었다. 대신에 미군정-경찰-우익의 연결체제는 그 무력적 능력을 분명히 과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0월인민항쟁은 변혁적 지향의 민중적 요구와 보수적 반동적 세력의 무력적 대응 사이의 힘의 관계에 있어 역전이 되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각 장의 주요 내용에 바탕했을때 제1장 서론에서 제시한 문제제기에 대한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10월인민항쟁의 구체적 모습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실확인의 문제는 이 논문의 내용에서 자연스럽게 대답되었다

둘째, 10월인민항쟁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다양한 지역적 편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이 시사하는 바는, 각 지역의 역사적 배경(예컨대 적색농조의 존재) 해방 직후의 사회경제적 상황(예컨대 인구유입과 식량문제) 등이 실제 항쟁파급과정상의 제 요인들과 더불어, 지역마다 독특한 항쟁모습을 형성시켰다는 점이다.
셋째, 10월인민항쟁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참여자라는 측면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고 전민중이 참여하였거나 호응하였다.
다음으로 조작성이란 측면에서 살펴볼 때 각 군이나 지역에 있는 좌익세력의 조직들이 주요한 역할을 하여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군 이상의 조직적 연결을 보이지 않으며 군에서 군으로 파급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분절적인 조직역량의 폭발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지역에 있어서 분절적인 조직역량의 연속적 폭발과 관련하여 몇가지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중앙의 좌익지도부와 경북도 또는 군의 좌익세력 및 민중 사이의 괴리현상이 나타났다. 즉 중앙지도부는 분파투쟁 및 노선갈등의 일환으로서 10월인민항쟁을 촉발시켰으나, 민중은 일제하에서 쌓여온 모든 원한과 불만을 폭발시켰고 새로운 민중의 행정과 치안을 수립하기 위하여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공격 접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지도를 중앙좌익지도부가 수행하지 못하였다. 요컨대 10월인민항쟁은 올바르지 못한 중앙의 지도와 헌신적인 지방의 민주투쟁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중앙 좌익지도부의 체계적인 지도가 없었다 할지라도 10월인민항쟁은 엄청난 힘을 폭발시켰다. 이를 진압시킨 주 세력인 미군과 경찰의 무장력 중에서 미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혁명적 상황으로 급속히 진전될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러나 미전술군의 투입과 타도에서까지 내려온 경찰력에 의해 경북항쟁은 진압되었다.
보다 넣게 바라보아 해방5년사에 있어서의 변혁운동이란 맥락에서 볼 때, 10월인민항쟁은 민중들의 거대한 힘이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기 때문에 좌익세력의 조직역량은 상당히 붕괴되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을 때 광범위한 조직역량의 동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즉 너무 일찍 조직역량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변혁을 위한 거대한 힘의 폭발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민중의 잠재적 역량의 역사사상의 구체적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경북항쟁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민중의 요구 주장 행동 등을 살펴볼 때, 反미군정, 식량문제 및 생활난에 대한 불만, 인민위원회에 의한 치안과 행정 요구 등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방적 것’이 아니라, 변혁을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내용과 일상적인 생활의 불만 등의 내용까지 耽暉求?것이었다.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10월인민항쟁의 구체적 전개과정을 분석해보았을 때, 10월인민항쟁은 ‘폭동’이나 ‘소요’나 ‘농민의 추수봉기’ 등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변혁을 향한 ‘민중의 항쟁'(당시에 민중 대신 쓰인 인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인민의 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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